해기사의 가치를 다시 생각할 때
김영길 | (사)한국선장포럼 사무총장
최근 선원의 날 관련 행사에서 사용된 "선원이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는 문구는 오늘날 해운과 선원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오늘날 세계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장 짧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문장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에너지, 식량, 원자재, 자동차, 전자제품, 의류, 의약품의 상당 부분은 바다를 통해 이동한다. 세계의 공장과 시장, 자원 생산지와 소비지는 해상교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항만의 크레인이 멈추고, 선박이 항해를 멈추고, 그 선박을 움직이는 선원이 멈추면 세계 경제는 곧바로 흔들린다. UNCIAD는 세계 상품무역 물동량의 80% 이상이 해상으로 운송된다고 밝히고 있다. 대량의 원유, LNG, 철광석, 석탄, 곡물, 컨테이너 화물을 가장 경제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송하는 수단은 여전히 선박이다. 첨단산업이 발전하고 항공 물류와 디지털 경제가 확대되었지만, 세계 경제의 기본 물동량은 지금도 바다를 통해 이동한다. 바다는 세계 경제의 대동맥이고, 선박은 그 혈관을 따라 움직이는 운송 수단이며, 선원은 그 흐름을 실제로 유지하는 핵심 인력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선박을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선원이며 그중에서도 선장, 항해사, 기관사로 대표되는 해기사다. 선박은 갈수록 첨단화되고 자동화되고 있지만, 해상에서의 최종 판단과 책임은 여전히 사람에게 있다. 항로를 선택하고, 충돌 위험을 판단하고, 기상 악화를 회피하고, 기관 고장에 대응하고, 화재 좌초•오염 사고를 막는 일은 단순한 장비 운용이 아니다. 전문성과 경험, 책임감이 결합한 해기사의 직무다.
한국은 제조업과 무역에 기반을 둔 국가다. 원유, LNG, 철광석, 곡물 등 주요 원자재는 대부분 해외에서 들어오고,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조선기자재 등 주요 수출품은 세계시장으로 나간다. 이러한 산업구조에서 해운은 선택 산업이 아니라 국가기간산업이다. 해운이 흔들리면 수출입이 흔들리고, 수출입이 흔들리면 산업과 국민경제가 영향을 받는다.
한국 해운의 위상은 절대 작지 않다. e-나라지표의 주요 해운 선진국의 지배선대 현황'에 따르면, 2024 년 우리나라 지배선대는 약 1억 100만 DWr로 세계 4위 수준이다. 순위로 보면 중국, 그리스, 일본 다음이 한국이다. 이는 한국 해운이 단순한 국내 산업이 아니라 세계 해운시장에서 상당한 규모와 영향력을 가진 해운국이라는 뜻이다. 또한 한국은 LNG 운반선, 대형 컨테이너선, 친환경 연료 추진선, 스마트 선박 등 고부가가치 선박을 건조하는 세계 최상위 조선국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처럼 큰 선대와 산업 기반을 실제로 운항하고 관리할 한국인 해기사 기반이 충분한가 하는 점이 다. 한국 해운은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지만, 한국인 선원과 해기사의 수는 꾸준히 줄고 있다. e-나라지표의 국적 선원 취업 현황'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적 선원 취업자는 3만 2,487명이고, 해외 취업 선원을 포함해도 전체 국적 선원 취업자는 3만 5685명 수준이다. 한국은 세계 4위권의 지배선대를 가진 해운국이지만, 이를 지속 운항하고 관리할 한국인 해기 인력 기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선원 감소의 배경은 복합적이다. 인구 감소, 직업 가치관의 변화, 가족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근로환경, 육상 근로자와의 임금 격차 축소, 선원 직업의 상대적 매력도 저하 등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과거에는 해기사 가 높은 임금과 해외 경험, 전문직이라는 자부심으로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청년 세대는 임금만큼이나 가족과의 시간, 워라밸, 직업 안정성, 사회적 인정, 경력 전환 가능성을 중시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외국인 선원 활용은 부족한 승선 인력을 일정 부분 보완해 왔다. 그러나 외국인 선원 의존 확대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평시 상업 운항에서는 비용과 수급 논리에 따라 다양한 국적의 선원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비상 상황, 전쟁과 분쟁, 팬데믹, 해상교통로 차단, 대규모 물류 위기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승선 인력이 아니라 국가의 해상수송을 이해하고, 한국 선사와 화주, 정부와 즉시 소통할 수 있는 핵심 해기 인력이다.
세계 해운 질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 해기사의 핵심역량이 전통적인 항해술과 기관 운전 기술이었다면, 이제는 그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디지털 항해 장비, ECDIS, AIS, VDR, 위성통신, 사이버 보안, 자율 운항선박, 친환경 연료, 탄소 규제, 항만국통제, 해상 보안, 인권•노동 규범까지 해기사가 이해해야 할 영역 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탈탄소화는 해기사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LNG,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등 대체 연료 선박은 기존 연료유 선박과 다른 위험성을 가진다. 연료의 독성, 폭발성, 극저온 특성, 벙커링 절차, 비상 대응 방식이 달라진다. 기관사는 단순히 엔진을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항해사는 안전 항로를 선택하는 사람을 넘어 선박의 운항 효율, 탄소 배출, 항만 스케쥴, 연료 전략까지 이해해야 한다.
해상 안보 환경도 변하고 있다. 홍해 사태, 흑해 전쟁, 호르무즈해협 긴장, 남중국해 갈등, 해적 위험, 사이버 공격 등은 해운이 더는 순수한 상업 활동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선박은 언제든지 지정학적 리스크의 최전선에 설 수 있다. 이때 선장은 단순한 운항자가 아니라 선원의 생명, 화물, 선박, 환경, 회사와 국가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현장 지휘관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해기사의 가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높고, 에너지와 원자재의 해외 의존도가 높다. 또, 반도체•자동차 조선•철강 등 국가 핵심 산업이 해상수송망과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 해기사 확보는 단순한 고용정책이 아니다. 공급망 안보, 경제 안보, 국가안보의 문제다.
세계 선원 시장에서 한국 해기사는 필리핀, 인도, 중국처럼 대규모 인력 공급국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해기사는 한국 해운과 조선, 항만, 선박 관리, 해사 안전 체계의 중심 인력이다. 한국 해운의 위상과 한국 해기사의 위상을 비교할 때 중요한 것은 단순 인원수가 아니라 역할의 중요도다. 한국 해기사는 선박을 운항하 는 직업인을 넘어 국가 물류망의 운영자이며 해상안전의 전문인력이고, 비상시 국가 전략자산이다.
해기사는 해양 안전과 환경 보호의 최전선 인력이기도 하다. 충돌, 좌초, 화재, 폭발, 오염 사고는 한순간 에 인명 피해와 막대한 경제적 손실, 환경 피해를 초래한다. 사고를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여전히 숙련된 사람이다. 더 나아가 해기사는 미래 해운 기술의 현장 적용자다. 자율운항선박, 친환경 선박, 스마트십, 디지털 항만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기술을 이해하고, 감시하고, 비상시 개입하고, 현장에서 운용할 전문 해기 인력이 필요하다.
최근 논의되는 국가전략해기사 제도는 이러한 배경에서 매우 시의적절하다. 국가전략해기사란 단순히 특정 자격을 하나 더 만드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평시에는 고도화된 상선 운항을 담당하고, 비상시에는 국가 필수 해상수송을 유지할 수 있는 핵심 해기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관리•지원하는 제도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해기사 양성을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보아야 한다. 선원과 해기사는 단기간에 길러지지 않는다. 면허 취득, 승선 경력, 선종별 경험, 직책별 책임, 비상 대응 능력은 시간이 쌓여야 형성된다. 해기 인력 양성은 최소 10년 단위로 보아야 하는 국가 인적자원 정책이다. 해기사를 많이 배출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승선 초기 정착, 중간관리자 단계의 경력 설계, 장기 승선 인센티브, 육상 전환 후 재승선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선원 직업을 좋은 직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청년 세대에게 해기사 직업을 권하려면 사명감만으로는 부족하다. 합리적인 임금, 충분한 휴가, 안정적인 교대체계, 가족과의 연결성, 선내 인터넷, 정신 건강 지원, 안전한 선내 문화가 필요하다. 좋은 인력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근로환경과 사회적 존중을 제공해야 한다.
한국 해운은 세계 속에서 이미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선대 규모가 크다고 해서 해운 강국이 완성되진 않는다. 선박을 확보하는 것과 선박을 안전하게 운항할 사람을 확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선박은 돈과 금융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지만, 숙련된 해기사는 시간과 경험, 교육과 자부심으로만 길러진다.
"선원이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는 말은 세계 해운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더 절실한 의미를 둔다. 한국 선원이 멈추면 한국 해운이 흔들리고, 한국 해운이 흔들리면 한국경제의 해상 생명선이 흔들린다. 원유와 LNG가 들어오지 못하고, 수출 화물이 제때 나가지 못하고, 항만과 조선과 물류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면 그 피해는 특정 업계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기사를 다시 보아야 한다. 해기사는 바다 위의 근로자이기 이전에 국가 경제의 운항자다. 선장은 한 척의 배를 지휘하지만, 그 배에는 화주의 신뢰, 선사의 책임, 선원의 생명, 국가 물류망의 안정이 함께 실려 있다. 기관사는 기관실을 지키지만, 그 기관실에는 에너지 안보와 환경 안전, 선박의 생존성이 함께 달려 있다. 항해사는 브리지에서 항로를 감시하지만, 그 항로는 세계와 한국을 잇는 경제의 길이다.
이제 해기사의 가치를 임금표나 승선 인원 통계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해기사는 평시에는 무역과 물류를 움직이고, 위기 시에는 국가의 생명선을 지키는 전략 인력이다. 한국 해운이 세계 속에서 계속 존중받기 위해서는 한국 해기사도 그에 걸맞은 사회적 존중과 제도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
선원이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
그리고 한국 해기사가 멈추면, 한국 해운의 미래도 멈춘다.
지금이 바로 해기사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 주요 참고자료
UNCTAD, 「Review of Maritime Transport 2024」
e-나라지표, 「주요 해운 선진국의 지배선대 현황」 및 「국적 선원 취업 현황」 한국선원복지고용센터, 「한국선원통계연보」 Alphaliner 관련 공개 보도자료*원본 출처: 월간 「海바라기」 7월호 https://www.mariners.or.kr/business/business03_view.php?bd_code=magazine&bd_idx=7598